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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자가 된 변호사, 782일간의 처절한 싸움! 법은 누구의 편인가?

기사입력 2025-09-29 17:45
 연극 '프리마 파시'의 주인공 테사는 형사 재판을 검사와 변호사의 레이스로 여기며,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경주마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최고 명문 케임브리지 법대에 진학, 3명 중 1명은 중도 포기하는 과정을 거쳐 우수한 성적으로 법정 변호사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걸으며 '법정 최고의 승부사'라는 명성을 얻었고, 왕실 변호사 자리까지 제안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테사에게 재판은 사건을 심리하고 교차 검증하며 방어하는 일종의 '게임'이었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였다. 심지어 성폭행 혐의 의뢰인을 변호할 때조차 "모든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야 한다"며 피해자들을 상대로 집요한 반대 심문을 펼치는 것을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그러나 왕실 변호사 가문의 동료 변호사 줄리언과 '썸'을 타던 중 성폭행을 당하면서 테사의 인생과 굳건했던 신념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한 차례 성관계를 가졌고, 데이트를 했으며, 심지어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 때문에 줄리언의 행동이 '합의'로 해석될 수 있다는 현실은 테사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황 상태를 안겨주었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테사는 자신이 겪게 될 모든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다. 법적 감각으로는 '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고, 피해를 증언하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사는 행동하기 시작했고, 782일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고독하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게 된다.

 


'프리마 파시'는 1인극으로,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배우가 홀로 무대에 올라 테사의 시점에서 여러 목소리를 번갈아 표현하며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한다. 테사의 독백으로 이뤄지는 고통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고군분투는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특히 성범죄 가해자를 변호했던 유능한 변호사가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겪어야 했던 사회적 시선과 제도적 장벽은 극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진술은 항상 불완전한 증거로 취급되어 일관성과 신뢰성을 의심받고, 변호사와 배심원들은 피해자가 입은 피해보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판결 이후 가해자가 입을 피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현실은 테사를 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한 성범죄 피해자 전문 변호사는 이 연극을 관람한 후 "그래도 이 사건은 기소는 됐다"며 "우리나라였다면 가해 남성과 피해 여성이 이전에 성관계가 있었고, '썸'이 있었다는 점에서 경찰 수사에서 무혐의로 불송치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기소됐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현실의 높은 벽을 시사했다.

 

실제로 극의 배경이 된 영국 법원에서 성범죄 사건 유죄율은 60% 정도였지만, 유엔이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 내 강간 피해자 10명 중 1명만이 경찰에 신고하고, 신고 사건의 1.3%만이 실제 유죄 판결로 이어진다고 한다. 한국은 이보다 신고 비율이 더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에, 테사가 겪는 고통은 비단 극 속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셈이다. 테사는 여성 3명 중 1명은 성범죄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고 말하며 "내가 경험하기 전엔 몰랐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신뢰하고 지켜왔던 법과 시스템의 변화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는 극작가 수지 밀러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호주 인권 변호사 출신인 수지 밀러 역시 법률가로서 수년간 성폭력과 젠더 불평등을 겪으며 "법은 반드시 정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바로 '프리마 파시'를 집필한 이유가 되었다. 테사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듯, 법이 정의가 될 수 없는 지점과 '프리마 파시'가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는 오는 11월 2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만날 수 있다.